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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 운하(Suez Canal), 영국과 프랑스의 손에서 이집트 국유화

by 또링또링 2021.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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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똘이 아부지입니다.

이번에도 최지웅 저자의 '석유는 세계를 어떻게 지배하는가'의 흥미로운 내용으로 글을 이어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올해 초 수에즈 운하(Suez Canal) 막자?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중국을 출발해 네덜란드로 향하던 에버기븐호가 지난 3월 23일 수에즈 운하에서 좌초되며, 무역 교역에 엄청난 차질을 빚은 사건 중 하나였죠. 오늘날에도 중요한 해상 무역의 운송로로 여겨지는 수에즈 운하를 둘러싼 석유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수에즈 운하 (Suez Canal), 중동의 석유를 유럽으로 공급하는 통로

수에즈 운하는 1869년 프랑스 기술자 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 and de Lesseps)에 의해 개발 되었습니다. 이후 1875년 이집트의 통치자 이스마일 파샤(Ismail Pasha)가 파산 위기에 처하며 이집트 소유의 운하 자본이 시장에 나오게 되었고, 이 때 영국이 이를 착! 캐치하여 수에즈 운하의 지분 44%를 획득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를 공동으로 소유하게 되며 운하 운영의 수익 대부분을 가져가게 됩니다.

 

1950년 당시 수에즈 운하(Suez Canal)는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해 중동의 석유를 유럽으로 공급하는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이 당시 하루 130만 배럴의 석유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유럽으로 향하였으며, 이는 유럽 수요 절반 이상이었습니다.

 

아프리카를 돌아서 가기 싫은 그들의 열정으로 탄생한 수에즈 운하

 

 

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다

쿠데타가 밥 먹듯이? 일어난 중동에서 이집트도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ul Nasser)가 쿠데타를 일으키며 왕정을 폐지하고 정권을 잡게 됩니다. 흥미로웠던 점은 그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 등 제3세계 국가와 함께 비동맹주의를 주장하며, 당시 강대국인 미국과 소련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기로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이러한 이집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아스완댐 건설 지원 약속을 합니다. 하지만 이집트가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구매하고 중국을 외교적으로 승인하는 등 미국의 의도와 다르게 움직이자 미국은 아스완댐 건설 지원을 취소합니다. 미국의 지원이 중단되며 건설 자금 확보가 필요했던 나세르는 영국과 프랑스 소유였던 수에즈 운하를 일방적으로 국유화 해 버립니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가 운하의 수익을 가져가는게 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중동의 중년의 멋,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ul Nasser)

 

영국은 몇 년전 이란에 이어 이집트까지 반항?하는 모습을 보며 정신을 바짝 차리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당시 엄청난 수요가 요구되었던 석유의 운송로가 막히며 경제적 타격이 커지자 부랴부랴 움직였습니다. 당시 영국의 총리 앤서니 이든(Anthony Eden)은 프랑스와 그리고 이집트와 갈등 관계가 있던 이스라엘까지 끌어들이며 군사 대응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를 2차 중동전쟁, 혹은 '수에즈 위기' 사건이라고 합니다.

 

1956년 10월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은 간단히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이러한 군사 대응을 크게 반대하였는데요, 당시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가 재선을 노리고 선거를 준비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의 휴전을 이끌어 내고 '평화의 사도(a man of peace)' 이미지를 구축하려던 그에게 이집트의 군사 대응은 재선 전략 차원에서도, 아랍과의 관계를 고려해서도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미국은 말을 안 듣는 영국-프랑스를 교육하기? 위해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게 됩니다.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미국의 최후의 카드 : 원유 공급 계획 취소

영국과 프랑스가 열강의 자존심을 보이며 미국의 말을 듣지 않고 존버?를 하는 가운데 결국 미국은 최후의 카드를 준비합니다. 이집트 나세르 정권은 수에즈 운하를 점령당하기 전 바위와 시멘트를 가득 실은 선박을 침몰시켜 수에즈 운하를 폐쇄시켜 버립니다. 이를 인양하는 데만 수개월이 걸리기에 당장 유럽으로 석유가 가는 길이 막혀버리게 됩니다.

 

당시 유럽의 석유 재고 수준은 몇 주 분 밖에 없을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다른 방안으로 석유 공급이 없다면 서유럽은 심각한 에너지 위기를 겪을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당시 미국은 중동비상위원회(Middle East Emergency Committee)를 설치해 서유럽 우방국에 석유를 공급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는 이런 상황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수에즈를 철수하기 전에는 중동비상위원회가 활동하지 않을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수에즈에서 군사 대응을 한 사람들은 석유 문제도 그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미국이 꺼낸 최후의 카드는 바로 '원유 공급 계획 취소'였습니다. 아이젠하워의 원유 공급 중단 선언이 한달도 지나지 않아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1956년 11월 얌전히? 군대를 철수하게 됩니다. 물론 원유 공급 계획 취소 만으로 두 나라가 철수를 결정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도 있기는 합니다. 당시 소련의 핵 공격 위협, 미국의 경제 제재 등의 요소도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원유 공급 취소 조치와 함께 영국의 재무장관 헤럴드 맥밀런(Harold Macmillan)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석유 제재, 그것이 모든 것을 끝냈다"

 

헤럴드 맥밀런(Harold Macmillan), "미국 꼭 그래야만 속이 후련했냐?!"

 

 

석유 제재 그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철수 이후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 소유가 됩니다. 나세르는 중동의 영웅으로 떠오르며 그의 사상과 정책은 나세리즘(Nasserism, 아랍민족주의&범아랍주의)이라 불리며 아랍 세계의 희망이 됩니다. 반면 영국과 프랑스는 석유라는 자원으로 인해 국가의 자주권을 뺏길 수 있다는 20세기 최고의 굴욕을 겪어야 했습니다.

 

수에즈 위기와 함께 현대 국제 질서에는 큰 지각 변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이집트에서 철수시키며 국제 질서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확립하게 됩니다. 반면 영국과 프랑스는 그들이 더 이상 미국, 소련과 같은 강대국이 아님을 깨닫게 되고 새로운 전략 마련에 몰두하게 됩니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적국이던 독일과 화해를 추진하는 움직임을 보여주며 1963년 독불 화해 협력 조약을 체결합니다. 또한 미국의 원유 공급 취소와 더불어 소련의 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프랑스는 그 이후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눈에 쌍심지?를 키고 연구에 몰두한 프랑스는 3년 만에 최초에 핵실험에 성공하고 핵무장을 하게 됩니다.

 

화..화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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