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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 과거와 오늘 날의 이란

by 또링또링 2021.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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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똘이 아부지입니다.

저번 글에서 최지웅 저자의 '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에 대한 일부 내용을 소개하였는데, 오늘은 그 연장선으로서 중동하면 사우디와 함께 쉽게 떠오르는 이란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과 이란, 소련의 접경지로서 중요 요충지

1940년대 한국과 이란은 소련과 접경하고 있는 국가였습니다. 소련의 서쪽에는 이란이, 동쪽에는 한반도가 접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영국과 미국에게 있어서 소련과 공산주의 확장을 막기 위해 이란과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나라였습니다.

 

서쪽에는 이란, 동쪽에는 한국

 

이러한 이유로 영국과 미국은 1950년대 초 두 나라의 역사에 개입하기도 하였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미국과 영국은 파병 규모로는 1,2위를 보여줄 정도로 많은 병력을 파견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한국전쟁과 비슷한 시기 이란에서는 반영 감정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연합국의 강제적인 왕위 교체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란은 중립국을 유지하다 독일 쪽에 서게 되는데,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함에 따라 연합국은 당시 이란 국왕이었던 레자 샤 팔레비(Reza Pahlavi)를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 무함마드 팔레비(Mohammed Pahlavi)를 왕위에 앉힙니다. 이는 패전국 일본의 왕실을 유지한 것과 비슷한 전략으로, 연합국은 이러한 방식이 이란 국민을 통제하는데 유리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석유 때문이었습니다. 전 편에서 이야기 되었던 이란과 영국의 합작회사인 앵글로-페르시안은 1945년부터 1950년까지 2억 5,000만 파운드의 수익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란은 여기서 9,000만 파운드의 수익 밖에 챙기질 못했습니다. 같은 시기 사우디가 미국과 석유 수익을 반띵?하는 협정을 보며 이란 입장에서는 불만을 가지고도 남을 만한 이슈였습니다. 또한 사우디의 석유회사인 아람코(Arabian-American Company)의 경우 사우디의 'Arabia'가 앞에 있는 반면, 이란의 석유회사, 앵글로-이란 석유회사는 영국을 상징하는 'Anglo'가 앞에 있는 등 작은 문제들도 이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보자보자하니까 묵냈음!

 

 

반영 감정 속 무함마드 모사데크(Mohammed Mossadegh) 등장

이처럼 이란의 반영 감정이 커지는 가운데 민족주의 성향의 무함마드 모사데크(Mohammed Mossadegh)가 등장하게 됩니다.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의 국유화를 공약으로 내세우며 그는 1951년 국회에서 총리로 선출되었고, 연합국이 허수아비로 세웠던 팔레비는 물러나게 됩니다. 모사데크는 집권 후 바로 앵글로-이란 석유 회사를 일방적으로 국유화합니다.

 

당연히 영국은 이러한 이란의 주장을 받아 들일 수 없었고 즉시 페르시아만에 해군 함대를 파견하고 영국 은행에 예치된 이란 자산을 동결하였습니다. 또한 이란산 석유의 수입까지 금지하며 자체 판매망이 없던 이란의 석유 판매를 완전히 막아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1950년 이란의 일일 원유 생산량은 65만 베럴에서 2만 베럴로 급감하게 됩니다. 이럼에도 모사데크는 뒤로 물러나기 보다는 더욱 굳건한 태도를 보입니다.

 

무함마드 모사데크(Mohammed Mossadegh), "응, 석유회사 우리꺼"

 

"영국의 수입 금지 조치로 우리 석유를 지금 세대가 팔지 못하면 후손을 위해 땅속에 남겨둘 것이다."

 

1951년 보수당의 처칠 내각이 들어선 후 몇 차례의 제안과 협상이 있었음에도 모사데크는 이를 다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결국 영국은 앵글로-이란 석유회사의 국유화를 되돌리기 위한 협상을 포기합니다. 

 

 

미국, 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 성공과 비판

1952년 한국전쟁으로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으며, 영국 정보기관은 모사데크 정권이 소련에 가까워지고 있다고하며 그를 놔둘 경우 이란이 공산화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중동 지역이 공산화되는 것은 치명적인 위기로 간주되었기에, 영국의 처칠은 플랜 Y라는 군사 작전 계획 실행 직전 단계까지 갔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국무 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은 영국의 군사 작전을 만류하였습니다. 이미 한반도에서 전쟁이 진행 중이었고, 다른 중동 국가들과 소련을 괜히 더 자극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신 미국은 자신들의 손에 피한방울 안 묻히고 이란을 제압할 방법을 고안해 냅니다. 1953년 한국전쟁의 휴전이 조인된 후, 미국 CIA는 영국 정보기관 MI6와 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라는 쿠데타를 준비합니다. 당시 석유 수출이 막혀 경제난과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란 군중들에게 돈을 풀어 시위를 유도하고, 군부를 매수하여 쿠데타를 실행하게 합니다. 결국 미국의 빵빵한 지원을 받은 군부 세력은 모사데크를 쫓아내고 이란 국왕 팔레비가 다시 정권을 잡게 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로 인해 팔레비는 친미, 친영 지도자가 되며 1978년까지 친미서구화 정책을 추진합니다.

 

아작스 작전 (Operation Ajax)

 

 

모사데크 정권을 물러나게 한 이 사건은 미국에 도덕적, 정치적 부담을 남기게 합니다. 민주적이면서도 자유를 외치던 미국이 서구식 민주적 방식으로 선출된 모사데크를 축출하는 내로남불?의 모습을 보여주며 비난을 면치 못했습니다. 또한다시 정권을 잡은 팔레비가 이슬람의 정체성을 무시하며 서구화 정책을 강압적으로 추진하며 이를 반대하는 이슬람 혁명이 추후에 촉발됩니다. 이는 오늘날 미국과 대립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이 탄생하는 배경이 됩니다.

 

 

지금은 너무나도 낯선 당시의 서구화된 이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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