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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의 인문학 서재_경제적 관점의 역사_고대 그리스부터 르네상스 훑어보기

by 또링또링 2020.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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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똘이 아부지입니다. 지난 번에 포스팅한 투자자의 인문학의 서재 내용 중 추가적으로 정리하고 공유하고 싶은 내용이 있어서 다시 한 번 포스팅하게 되었습니다. 흔히 세계 역사를 이전부터 현재까지 돌아볼 때 주로 역사적인 사건이나 철학적인 관점에서 보는 경우는 많지만 경제적인 접근을 하는 경우는 많이 없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서준식님의 수많은 역사적 사회 현상을 '경제적' 돈'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서술하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왔고 이렇게 다시 정리하며 공부하게 되었네요. 그럼 간단한 정리를 통한 포스팅을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가의 경제론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유명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중 한명인 플라톤은 그의 저서인 <국가론>에서 시민의 계급을 농부, 수공업자 등 생산주체와 군인 및 정치가로 나누는 분업 체계를 적용하고, 철인(철학자) 만이 정치가를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정치와 행정을 동시에 맡는 공산주의 시스템과 유사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국가 재산의 공동 소유, 자급자족경제, 계획경제 등 그가 주장한 내용의 상당 부문이 공산주의 체제와 유사한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국가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정치가가 부정부패를 일삼으면 국가는 붕괴할 수 없다보며, 철인(철학자)들에게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였습니다. 철인은 늙을 때까지 엄청난 양의 교육을 받아야 하며, 사유재산 축적이 금지되었고, 자신의 자식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해야 했습니다. [리얼 철인..]

 

아리스토텔레스란 이름은 누구나 들어봤을 이름이라 생각합니다. 정치학, 논리학, 과학, 윤리학, 시학, 수사학 등 우리가 지금까지 배우는 과목들의 기원이 그의 저서에서 나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죠. 이러한 그에게 경제 분야의 견해는 플라톤과 크게 달랐습니다. 그는 물물교환과 교역을 중요시하였으며 화폐의 적극적인 사용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재산의 공동 소유를 주장한 플라톤과 달리 사유재산을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많은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 중심적 철학이 중세 사회를 변혁시키고 자본주의 시대로 넘어가게 하는 근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수제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둘의 철학적 차이는 너무나도 달랐으며 이는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라는 명화에서도 보여지고 있습니다. 현실을 초월하는 이데아를 탐구한 플라톤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반면 모든 본질은 현실에 있다고 본 아리스토텔레스 손바닥을 밑으로 향함으로써 이들의 철학적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중세 시대에 자본주의의 시작을 알리다

그리스 시대 이후 로마 시대는 전쟁이 경제논리를 장악해 버리며 이에 대한 논의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전쟁을 통해 획득한 재물은 소수 상위 계층에만 집중되었으며, 전쟁을 치르느라 농사를 짓지 못한 서민들은 논밭을 잃고 피폐해져 갔습니다. 이러한 로마의 멸망 원인을 도덕성 타락, 게르만족 침입 등 여러 견해로 볼 수도 있지만 경제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부동산을 통한 '부의 양극화'로 서민 경제가 피폐해져 국력이 약해진 것을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로마 시대가 끝나고 중세 시대에 들어서는 종교의 윤리의식이 모든 경제 논리를 장악해 버렸습니다. 재물의 축적이나 이윤 추구는 모두 죄악시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본주의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13세기에 철학자이자 수도승이었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등장하며 시대의 흐름을 바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신이 보다 완전한 믿음을 위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다는 주장', '자유의지로 신을 믿기에 그 믿음은 더욱 가치가 높다는 주장'은 무조건 신을 믿어야 한다는 교리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성에 근거하여 그는 오랫동안 억압되온 경제활동에 숨통을 틔워 주었습니다. 구매자가 지불에 동의할 정도의 이윤을 남기는 것을 용인하며 수공업과 상업활동이 번창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돈을 빌려준 측이 기회를 놓치거나 손해의 위험이 발생할 수 있을 때에는 이에 합당한 이자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예외적인 이자 허용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세상의 존경을 받는 대 사상가였기의 시대 분위기에 반하는 '이윤', '이자'를 일부 인정한 그의 주장은 파급력이 컸으며, 이는 이후 자본주의의 씨앗 역할을 하였습니다.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인 토마스 아퀴나스

 

메디치 가문과 함께, 은행업의 꽃을 피운 이탈리아

이 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생산과 상업, 무역이 활발해졌고 기독교 교리에서 다소 자유로운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이자를 취하는 방식의 금융업이 융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같은 도시에서 대형 은행으로 변신한 무역상 가문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메디치 가문은 15~18세기 동안 최대의 은행으로 피렌체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가문의 수장이었던 조반니 디 비치에 의해 1397년 설립된 메디치은행은 로마, 베니스, 나폴리, 바르셀로나, 런던, 리용, 아비뇽 등 유럽 16개 지점을 개설하며 최초의 근대식 은행이 되었습니다. 메디치은행은 교황청의 금전 출납 담당을 맡으며 현금의 직접적인 이동대신 장부 기재를 통한 계좌 이체 방식을 적용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또한 그의 아들과 손자를 통해 메디치 은행의 번영은 절정을 달하며 르네상스를 발현시키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동네 아저씨처럼 생긴 조반니 디 비치

 

르네상스는 14세기 후반에서 16세기 후반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 중심 철학을 바탕으로 나타난 문예 부흥을 일컫습니다. 특히 이탈리아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발원지로 볼 수 있으며, 그 피렌체를 장악하고 있던 메디치 가문의 부 덕분에 수 많은 문예 활동이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이 가문의 후원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오늘날까지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시대와 명작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메디치 가문이 예술을 후원한 이유를 그들이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경제활동이라는데 숨통을 틔워 주었다고 해도 당시만 해도 돈을 버는 행위는 죄악시되었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학창시절 당시 역사는 그저 암기과목에 지루한 학문이라 여겼던 저를 반성하며 이렇게나마 역사를 조금 알고 경제사도 배워 나가봅니다. 또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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